직업으로서 여행가

아내는 맛있는 에스프레소를 앞에 두고도 고민이 많았다. 나야 노는 게 가장 큰 목적이었지만. 아내는 여행을 좋아해서 그 일을 직업으로 삼았는데, 언제부턴가 그 일이 그녀에게 많이 힘들어보이기 시작했다. 2013, Firenze, Italy


나는 프로그래밍을 사랑한다. 또 그 사랑이 순수한 것이기를 바란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고, 하고 싶은 일은 유보되거나 자연스럽게 폐기된다. (중략) 이래서 정말 좋아하는 일은 취미벽 안 쪽에 완고하게 격리시키고, 직업이 얼씬도 못하도록 경비해야 한다. 이고잉, 직업과 취미

연금술사의 레시피

마음씨 좋은 시골 할아버지처럼 웃고 있지만 그야말로 지독할 정도의 완벽주의자였다. 그는 창작을 위해 스스로에게 건 싸움, 그에 수반되는 고통이 고스란히 담긴 매일매일의 작업 노트와 <백 년 동안의 고독>의 복잡한 가계도(family tree)를 없애버렸다. 가족들에게조차 작업의 90%를 마친 후에야 등장 인물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심지어 아내에게 보냈던 러브레터를 회수해서 없애버렸을 정도이니.

텍사스 대학의 The Harry Ransom Center가 올 해 4월 타계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ía Márquez)의 기록을 수집했다고 한다. 매뉴스크립트, 노트, 사진 앨범, 편지, 두 대의 Smith Corona 타자기와 다섯 대의 애플 컴퓨터 등의 유품이 그것이다. Ransom Center는 미국의 손꼽히는 문학 아카이브를 갖추고 있고, 마르케스의 기록은 제임스 조이스, 헤밍웨이, 윌리엄 포크너, 보르헤스의 기록과 함께 보존된다고 한다.

프라이버시의 보호를 넘어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자신의 나약함,  미완성-수정 원고 등을 그의 기록을 통해 볼 수 있게 되었다. 마르케스는 “나의 모든 삶과 생각은 내 책 속에 있습니다”라고 말했지만, 독자들은 작품 이면에 있는 것들까지 궁금해한다. 그것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아카이브는 그것을 보여줄 수 있다.

시약에 대한 레시피를 공개하는 것을 늘 꺼렸지만, 기록을 통해 우리는 마르케스라는 유명한 연금술사의 실험실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 Jose Montelongo, a Latin American literature specialist at the University of Texas

NYT – Souvenirs of a Literary Alchemist

한편 마르케스의 기록이 미국으로 간 것에 대해 (당연히)콜롬비아에서는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Colombia to Receive Some García Márquez Effects

I will have the original

디지타이징의 힘을 빌어 역사의 조각을 어둠속에서 꺼내고는 있지만 Ms. Chatalbash는 그녀의 전문직이 구식이 될까봐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디지털 자료가 많아져도 여전히 아키비스트는 기록을 마술처럼 부리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자신있게 말했다. “나는 원본을 갖고 있을 겁니다” – Rachel Chatalbash, Archivists Round Table of Metropolitan New York, Inc.

NYT – Leaving Cloister of Dusty Offices, Young Archivists Meet Like Minds

NYT나 The New Yorker 에서는 간혹 아카이브-아키비스트와 관련된 스토리를 볼 수 있다. 한국의 미디어들도 ‘우리를’ 몇 번 다루긴 했었는데, 기록이 없는 나라직업의 세계 – 기록연구사 가 현실 분석개탄이나 유망직업의 하나로 다뤘던 것에 비해, NYT나 The New Yorker에는 문화의 관점에서 다룬 게 많다. 그런데. 미국이니까, 뉴욕이니까 다르겠거니 우리는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그들의 사정 -아카이브와 아키비스트에 대한 낮은 인식- 도 우리와 많이 다르지는 않은가보다.

You say you’re an archivist, and no one knows what you do. – Rachel Chatalbash

망각으로부터 자료를 재빠르게 구해내는 전문가 집단(Archivists are the specialists who snatch objects from oblivion), 미래를 보는 눈으로 자료를 모으고 그런 작업을 통해 과거에 창을 내는 사람들(Archivists gather essential items with an eye to the future, and their work, done properly, becomes “a porthole into the past”)이라는 설명을 구구절절 붙일 정도로 아마 거기에서도 아키비스트는 여전히 스스로를 설명해야 하는 사람들인가보다. 하긴, 우리 엄마도 여전히 당신 아들의 직업을 ‘속기사’ 정도로 생각하고 계시니…어쨌든 “우리는 원본을 갖고 있다”는 Ms. Chatalbash의 말은 정말 멋지다.

+ 관련 일화 – 이 기사는 SAA(Society of American Archivists) 링크드인linkedin 채널에도 공유됐는데. 기사 댓글에서 한 컨설팅 아키비스트는 “dusty”나”cloistered” 등의 단어를 사용하는게 좀 불편하다고. 우리가 이런 낡고, 진부하며 부정적인 전형으로(라도) 스스로를 알리는게 싫다고. 이건 좀 생각해 볼 만한 지적인 것 같다.

Harry’s Truman Razor

취향은 어떤 경험을 통해 생기거나 다듬어지고 익숙해지기도 하는데. 가끔 ‘발견되기도’ 한다. HARRY’S Truman의 매끈한 핸들을 봤을 때 딱 그랬다. ‘아, 저걸 한 번 만져봤으면…’ , ‘면도기의 핸들이라는게 저럴 수도 있구나.’ , ‘맞아, 저게 내가 원하는 면도기 디자인이었지.’


(거의 대부분의)남자들이 일상적으로, 습관적으로 면도를 한다. 개귀찮다. 면도기 하나에 많은 관심을 두진 않는다. 나역시. 흔히 쓰는 건 질레트나 쉬크. 대형마트에서도 동네 슈퍼에서도 판다. 3중날보다 4중날이 비싸고, 4중날보다 5중날이 비싸다. 몇년 사이 면도기 회사들이 날을 늘려가는 걸 보면서. ‘그럼 10년뒤엔 한 15중날 –질레트퓨전프로글라이드파워피프틴블레이즈레이져- 이런게 나올까?’ 생각도 했다. 가끔 여행이나 출장으로 늘 쓰던 그걸 챙기지 못했다면 편의점에서 몇 백원짜리 Bic이나 도루코를 집는다. 그것도 아니라면 호텔(모텔)에서 판매하는 반투명 비닐팩을 산다. 거기엔 면도기를 포함해 칫솔, 치약, 샴푸, 린스, 일회용 헤어밴드, 콘돔 따위가 들어있다. 물론 두 개씩. 천원. 한 때 턱수염 좀 길러보겠다고 필립스나 브라운의 트리밍이 가능한 전기면도기도 써봤지만. 문제는, 난(우리는) 털이 적은 종족이었다. 그럴싸한 트리밍을 위해서는 구레나룻에서부터 턱과 코밑에 이르기까지 수염이 많아야 밸런스가 맞는데, 그거 좀 길러보겠다고 며칠씩 면도를 안하면 그 중 몇 가닥만 길게 자랐다. 젠장. 그리고 이런 핀잔이 따라왔다. “야, 너 면도 안하고 다닐래? 드러운 놈” 아아아…


Harry’s는 Tech Crunch – Warby Parker Co-Founder Launches Harry’s, Bringing The Startup’s Buy-One-Donate-One Model To Shaving 를 읽다 알게 됐다. Warby Parker 라는 안경-선글래스 스타트업이 독특한 판매와 브랜딩 전략으로 화제가 됐는데 워비파커의 창업자이기도 한 Jeff Raider가 새로운 스타트업을 시작했다고. 이번엔 면도기. Jeff는 높은 품질의 제품을 낮은 가격에 판매하는 것이 면도 시장에서도 가능하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특히 소비자에게 직접 다가가는 방식인데, 워비파커와 마찬가지로 디자인, 생산, 유통을 통합하는게 그것이었다.


각종 리뷰를 뒤졌다. 그걸 읽지 않았더라도 샀을테지만. 미국의 배송대행지를 거쳐 인천에 도착. 뉴욕 폭설을 간발의 차이로 피했다. 무슨 그까이꺼 면도기까지 직구를

2014-11-25 20.57.01

우선 패키지. Truman set는 $15인데 패키지가 이 정도. 면도기, 쉐이빙 젤, 여분의 날 2개, 휴대용 커버. 거기에 $10를 더해 애프터 쉐이브 모이스춰라이저를, $15에 여분의 날 8개를 더 구입했다. 총 $40. 읽어본 모든 리뷰의 “Good shave at a fair(affordable, competitive) price” 에는 이견이 없다. 질레트나 쉬크의 억센 투명 플라스틱 패키지의 거칠게 뜯긴 단면이나 모서리에 손을 베거나 찔리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해리스는 만년필 패키지같다. 스윽- 밀거나 손가락의 경쾌한 힘으로 작은 상자를 열면 된다. 첫 인상이 부드럽다. 이런 경험은 중요한데, 사납게 뜯어버린 패키지는 쓰레기가 되지만, 순하게 연 상자는 곧장 휴지통에 던져버리기엔 아깝기 때문이다.(이런 걸 쿠퍼티노 놈들이 잘한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핸들handle. 날blade이 아니고. 적당한 무게와 미끈한 디자인은 최고. 손에 쥔 ‘그립감’이 아주 좋다. 질레트, 쉬크, 도루코 등 다른 제품의 핸들은 손에서 미끄러지지 말라고 상어 등지느러미 같은 돌기를 핸들에 박어 넣곤 하는데, 문제는 이게 좀 마초적으로 보일 정도로 못 생겼다는 점이다. 반면 해리스 Truman의 경우 아연 합금(zinc alloy)을, 상위 라인인 Winston은 알루미늄을 사용해서 알맞은 무게를 통한 해법을 제시했다. 이건 우리가 중지-약지-소지와 손바닥 아랫부분으로 핸들을 잡는 힘에 신경을 쓰도록 한다는 것이다. 또한 다른 제품의 컬러가 남자다운 검은색이나 형광의 파란색, 주황색을 섞은 것임에 반해, 해리스 트루먼은 핸들에 한 가지 색을 사용한다. 컬러 옵션으로 노틸러스 블루, 아이보리, 올리브, 오렌지의 네 가지를 제공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질레트-쉬크-도루코의 디자인이 좀 과장된 것이라면(very cheesy overly decorated look) 해리스는 우아하다.(elegant and understated or sexy-looking) 원래 클래식한 디자인이 쉽게 질리지 않는 법이다. 한 리뷰어는 해리스의 핸들 디자인을 “it’s the iPhone of razors” 라고 평했는데 무엇을 더 말하리오.

쉐이빙 크림과 젤이 옵션인데 나는 젤을 선택했다. 해리스의 멘솔과 유칼립투스향이 좋긴 하지만 리뷰어들은 다른 제품에 비해 좀 별로라는 평을 줬다. 이유는 거품이 잘 안난다고. 나는 그런 점을 특별히 느끼지는 못했다. 아마도 깎아야 할 털이 많은 yankee(비하 아님)들의 경험에선 그럴 수도. 그간 써오던 질레트 쉐이빙 젤의 과한 멘솔이 면도 후 피부를 자극하는 것 때문에 따끔거렸는데, 해리스는 그런 자극이 덜했다.

1개의 면도날은 6일을 쓸 수 있다고 한다. 가격은 합리적이다. 16개들이 패키지의 경우 개당 $1.56로 질레트의 5중날이 개당 $3.56 인데 비해 훨씬 저렴하다. 턱이나 코밑의 수염을 밀어낼 때의 밀착감이 아주 훌륭하다. 패키지를 열 때의 경험과 근사한 핸들 디자인의 잔영 때문이 아니라 정말 좋았다. 면도를 하면서 우리는 미세하게 피부를 깎아내는 셈인데 면도날이 잘 밀착되면 같은 부위를 한 번만 지나가도 된다. 그런 점에서 해리스는 이제까지 써 본 것 중에 최고였다. 창업자 Jeff는 1년 동안 십수 개의 제품 조사를 거쳐 독일의 한 엔지니어와 계약을 맺었다고 한다. 면도날의 품질 기준에는 여럿이 있고 그 중 하나가 시간이 지나도 무뎌지지 않는 날카로움인데 그걸 충족시켰다고. 한 리뷰어는 면도 후 욕실의 습기 때문에 날이 금방 둔해졌다고 하는데 이 코멘트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았고 그는 다른 면도날을 써보고 자신의 의견을 고쳤다. 그건 아마 니가 털복숭이라서 그랬겠지…

그 밖에. 질레트 퓨전 프로글라이드 파워 같은 전동 기능의 부재가 언급됐지만, 잘 생각해보니 그게 꼭 필요한 건 아니라고. 단지 그것 때문에 질레트를 선택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또 워비파커가 챈들러나 버켓 등 사람 이름을 제품명으로 사용한 것과 마찬가지로 해리스는 트루먼이나 윈스턴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이유는 좀 더 친근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 제품 한 개를 사면 해리스가 한 개(에 해당하는 금액)를 기부하는 것도 워비파커와 같은 정책.

끝으로 사용설명서(라고 하기엔 면도기에 무슨 사용설명서) 2페이지의 유머에 또 한 번 감동. 이런 디테일을 엄청아주무척완전 사랑하는 나.

2014-11-27 13.13.44

참고한 리뷰

A Review of Harry’s Shaving Products

Razorpedia – Harry’s Razor Review

세 줄 결론.

  1. 사라, 두 번 사라.

  2. 수염이 적게 나는 게 아쉽…

  3.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해야 할 때.